
선비가 이름 짓고 실향민이 제 올리는 곳, 화순적벽
유배 온 최산두가 '적벽'이라 부른 절벽은 1985년 동복댐 확장 뒤 30년 가까이 닫혔다. 버스로 가는 망향정·망미정과 차로 가는 물염정까지 내력을 따라간다.
2026년 11월 7일, 화순적벽 셔틀버스가 하루 쉰다. 동복댐에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애향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실향민이 해마다 제를 올리는 망향정은 500여 년 전 유배 온 선비가 ‘적벽’이라 부른 절벽의 맞은편 언덕에 있다.
화순적벽 가운데 노루목·보산적벽 일대는 예약한 셔틀버스로만 들어가고, 물염정과 창랑적벽은 예약 없이 차로 간다.
광주의 식수원이 된 호수, 동복호
화순적벽은 동복댐 위쪽 약 7km 물길을 따라 선 절벽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크게 노루목적벽(장항적벽)과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 4개 무리로 나뉜다. 이 가운데 노루목과 보산 2곳이 동복호 상수원 보호구역 안에 든다.
동복호는 광주 시민이 마시는 물을 대는 저수지다. 광주시는 1971년 첫 동복댐을 쌓았고, 물이 모자라자 1982년 확장 공사를 시작해 1985년 끝냈다. 높이 44.7m의 새 댐에 물이 차면서 이서면 서리와 보산, 장항, 창랑, 물염 같은 마을과 적벽 아랫부분이 잠겼다.
화순군 기록으로 수몰 때 587가구, 2,654명이 이주했다. 지금 동복호 물은 2016년 놓은 도수터널을 따라 광주 용연정수장까지 높낮이 차이만으로 흘러간다.
일대는 1970년대 초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였고, 1985년 댐이 커지면서 출입마저 끊겼다. 2014년 10월 23일, 광주광역시와 화순군이 합의해 일부 구간을 다시 열었다. 출입이 끊긴 지 30년 가까이 지나서다.
평소 노루목과 보산 쪽으로 드는 길은 화순군문화관광재단이 운영하는 버스뿐이다. 걸어서도, 자기 차로도 들어갈 수 없다. 적벽 입구 초소에서 망향정까지 4.8km는 포장하지 않은 외길이다.
버스가 처음 서는 제1전망대에서는 거북섬을 내려다본다. 화순군 설명으로는 이서 쪽 적벽을 향해 헤엄쳐 가는 거북 모양이다.


낙화놀이가 열리던 퇴적암 절벽, 노루목적벽
제2전망대에서는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이 함께 보인다. 보산적벽은 노루목에서 서쪽으로 600m쯤 떨어진 작은 절벽으로, 꼭대기에 망향정이 있다. 국가유산청은 노루목적벽을 화순적벽의 대표 경치로 꼽고, 화순군은 그 높이를 90m로 안내한다.

이름은 장학리의 옛 마을 노루목에서 왔다. 노루목은 주된 길목을 이르는 말로, 한자로 옮기면서 장항(獐項)이 됐다. 조선 말 송병선의 「적벽기」에도 절벽 위로 난 좁은 길이 ‘장항치(獐項峙)’로 나온다.
절벽을 이룬 바위는 사암과 이암, 응회암이 얇게 번갈아 쌓인 퇴적암이다. 무등산권 세계지질공원은 이 층이 중생대 백악기 후기 능주분지에서 생겼다고 설명한다. 그 무렵 지금의 광주와 나주, 담양, 화순 일대에는 큰 호수가 있었다.
바위에 남은 물결 자국과 말라 갈라진 자국은 이곳이 건조한 기후의 호숫가였다는 증거다. 지금 동복호 물가에 선 절벽이 백악기에도 호숫가 퇴적층이었던 셈이다.

댐이 생기기 전, 노루목적벽 꼭대기에서는 해마다 4월 초파일 밤 낙화놀이가 열렸다. 장정 10여 명이 돌을 넣어 묶은 건초를 지고 오르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불을 붙여 강으로 던지는 식이다. 던지는 자리가 좁고 위험해 그 사람은 허리끈을 소나무에 묶었다. 강가에서는 꽹과리와 징을 쳤다.
조선 중기에 시작해 일제강점기에 끊겼다가 해방 뒤 되살아난 놀이다. 동복댐으로 절벽 아랫부분이 잠기고 마을 사람이 흩어지자 다시 끊겼다. 디지털화순문화대전에 실린 이서면 주민의 회고는 이렇다. “촌에 이런 귀경거리가 없어.”
노루목적벽은 옹성산 서쪽 비탈에 있다. 가을 오후 3시 무렵이면 서쪽에서 비스듬히 든 해에 절벽의 음영이 또렷해진다.

노루목적벽을 정면에서 마주 보는 옛 정자는 송석정이다. 국가유산청이 물염정, 망미정과 함께 화순적벽을 감상하는 정자로 꼽는 곳이다. 상수원 보호구역 한가운데라 버스 코스에 들지 않고, 1년에 한 번 화순군이 여는 가을 행사 때만 문을 연다.
유배 온 선비가 부른 이름, 적벽
통천문에서 내려 300m쯤 걸어 오르면 보산적벽 꼭대기 언덕이다. 망향정 둘레에는 ‘적벽동천(赤壁洞天)’과 ‘적벽팔경’을 새긴 돌이 섰다. 적벽동천은 이곳을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고, 적벽팔경은 『동복읍지』에 실린 적벽의 여덟 가지 경치다.


‘적벽’이라는 이름의 내력은 1519년 기묘사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광조와 신진 사류가 훈구 대신에게 화를 입은 이 사화 때, 사인 벼슬에 있던 최산두도 동복으로 유배됐다. 화순군은 그가 이 절벽을 보고 중국 적벽에 못지않다며 이 이름을 붙였다고 안내한다.
최산두는 1533년 풀려날 때까지 동복 나복산 아래 머물렀다. 그사이 김인후가 장성에서 동복까지 오가며 그에게 배웠는데, 오가는 길에는 늘 소쇄원에서 쉬었단다.
같은 1533년에는 임억령이 동복 현감으로 왔다. 화순군과 디지털화순문화대전은 ‘적벽동천’이라는 이름을 그가 붙였다고 적는다.
1586년 이곳을 찾은 김성일은 「유적벽기」에 최산두가 유배 와 산 뒤로 이 절벽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고 적었다. 1870년대 동복을 지난 한장석은 절벽 아래 ‘강선대’와 ‘적벽동천’이 이끼 속 붉은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남겼다.
국가유산청은 여지도서와 대동지지의 누정 기록, 편액과 상량문, 시비를 화순적벽의 역사·문화 가치로 든다. 1982년 전라남도 기념물이 될 때 ‘지형지질경관’이던 분류는 2017년 국가 명승이 되면서 ‘역사문화경관’으로 바뀌었다.
물에 잠긴 마을 15곳의 비석이 선 언덕, 망향정
언덕 한가운데 선 정자가 망향정이다. 동복호를 식수원으로 쓰는 광주광역시가 세워 1999년 준공했다. 건립을 이끈 이는 장두석이고, 지은 이는 목수 윤창병이다.

정자 둘레에는 물에 잠긴 마을 15곳의 비석과 망향비, 망배단, 천제단이 있다. 창랑과 보산, 장항도 그 이름 가운데 있다. 수몰민은 해마다 이 언덕에 모여 시제를 모시고 천제를 지낸단다.


고향 선산에 갈 수 없게 된 수몰민이 올리는 제사다. 광주 상수도사업본부 동복관리팀이 맡은 일에는 지금도 ‘성묘객 수송’이 들어 있다.
버스에서 내려 망향정과 망미정을 둘러보는 시간이 50분이라 정자에 오래 머물기는 어렵다. 적벽 안은 금연이고 음식물과 술, 반려동물을 들일 수 없으니 끼니는 버스에 오르기 전에 해결해 둔다.
소동파 「적벽부」에서 이름을 딴 정자, 망미정
버스가 내려 주는 구역에는 망미정도 있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정지준(1592~1663)이 1646년 지은 정자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북으로 가던 중 청주에서 강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와 적벽에 숨어 살았다.

이름은 소동파 「적벽부」의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에서 땄다. 하늘 저편의 임을 그린다는 구절이다. 디지털화순문화대전은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삼학사를 향한 마음이 담겼다고 풀이한다.
정자는 원래 적벽을 마주한 강 언덕에 있었다. 동복댐으로 자리가 잠기게 되자 지금 자리로 옮겼고, 2008년 화순군 향토유산이 됐다. 김삿갓이 동복 적벽에서 쓴 시에는 ‘망미(望美)’가 나온다. 화순군은 이를 들어 그가 세상을 떠난 1863년 전에도 정자가 있었다고 본다.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정자, 물염정
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은 예약 없이 자기 차로 간다. 물염적벽 건너편 언덕에 물염정이 있고, 절벽 이름도 이 정자에서 왔다.
정자는 16세기 중엽 송정순(1521~1584)이 세웠다. 구례 현감 등을 지낸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가던 길에 이곳 경치가 좋아 띳집을 지었다. 정자 이름이자 그의 호인 ‘물염’은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정자는 외손 나무송·나무춘 형제가 물려받았다. 나무송은 병자호란 뒤 이곳으로 물러나 시인 묵객과 어울렸다. 6·25 전쟁 때 상한 정자는 전쟁 뒤 다시 손봤고, 1966년 중창과 1981년 보수를 거쳤다.
현판 가운데에는 김인후와 이식, 권필, 김창협, 김창흡의 시문이 보인다. 김인후의 시에는 ‘강산천고주 인물백년빈(江山千古主 人物百年賓)’이라는 구절이 있다. 강산은 천고의 주인이요, 사람은 100년 손님이라는 뜻이다.
1759년 가을에는 홍대용이 물염정 아래로 나경적을 찾아갔다. 나경적은 이서면 야사리 출신으로, 자명종을 만들던 기술자다. 이듬해 그는 초청을 받아 나주로 가 철제 혼천의를 만들었다. 완성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 안처인과 홍대용이 마무리했다.
1777년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 현감으로 오자, 이듬해 17세(세는나이) 정약용이 물염정을 찾았다. 그가 쓴 「유물염정기」에는 정자가 마주한 적벽이 이렇게 나온다.
그 빛깔은 담홍색이며, 도끼로 깎아 세운 듯 우뚝하다.
정자 둘레에는 김삿갓 김병연(1807~1863)을 기리는 석상과 시비가 있다. 화순군 기록으로 그는 1841년과 1850년 동복을 찾았고, 1857년부터 머물다 1863년 구암리에서 숨을 거뒀다. 유해는 아들 익균이 거둬 강원도 영월에 묻었다.

그가 남긴 「무등산」은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 있고(無等山高松下在)’로 시작한다. 다음 구가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로 흐른다(赤壁江深沙上流)’다.
물염정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창랑적벽이다. 전망대에서 물 건너로 보는 절벽이다. 노루목적벽보다 작지만, 버스 시간에 매이지 않고 머물 수 있다.

이 기사에 나온 곳
- 주소
-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화순군 이서면 백아로 3114 (이서커뮤니티센터 탑승)
- 운영
- 2026년 5월 2일~12월 13일 수~일요일. 평일 10:00·14:00, 주말 10:00·11:00·13:00·14:00 출발, 약 1시간 45분(통천문에서 망향정·망미정 관람 50분)
- 휴무
- 월·화요일, 11월 7일(실향민 애향축제). 시간당 10mm 이상 비 예보·천재지변 때 운행 취소(전액 환불)
- 요금
- 1인 5000원. 카드 결제 또는 계좌이체(예약일부터 2일 안 16:00 전 입금, 넘기면 자동 취소)
- 예약
- 화순적벽버스투어 누리집 인터넷 사전 예약. 탑승일 2주 전 09:00~2일 전 23:00, 한 번에 4명까지, 회차당 42명. 30명 이상 단체는 하루 1팀 전화 예약. 취소는 4일 전 18:00까지 전액, 1~3일 전 18:00까지 절반 환불
- 문의
- 예약 확인·취소 061-379-3503·3504, 버스투어 061-373-5482, 탑승지 061-371-0173
- 가는 길
- 광주에서 217-1번 농어촌버스, 야사 하차
- 주소
-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화순군 이서면 물염로 161 (창랑리 373)
- 가는 길
- 예약 없이 개인 차량으로
- 주소
- 전남광주통합특별시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278
- 가는 길
- 예약 없이 개인 차량으로. 전망대에서 본다
2026년 10월 기준 정보입니다. 운영시간과 요금은 바뀔 수 있으니 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전국을 다니며 여행 기사를 씁니다. 가 본 곳 가운데 다시 가고 싶은 곳만 TBAG에 적습니다.
Map / 지도에서 보기
화순, 여기예요
진하게 칠한 점이 이 기사에 나온 곳입니다. 다른 점을 누르면 그 지역 기사가 나옵니다.
지도에서 점을 누르면 그 지역 기사가 나와요.
- 인왕산 계곡과 미술관을 걷고 한옥에 묵는 서촌CULTURE
- 종묘 담장길부터 경복궁 취향교까지, 고궁의 가을CULTURE
- 세종이 태어난 동네부터 한글로 새긴 비석까지 8곳CULTURE
- 불 놓고, 베고, 다시 심어 지킨 억새밭 6곳OUTDOOR
- 10분에서 30분, 제주 동쪽 오름 4곳OUTDOOR
- 메밀밭 밭담부터 산굼부리 분화구까지, 제주 조천 4곳CULTURE
- 불 놓고, 베고, 다시 심어 지킨 억새밭 6곳OUTDO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