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병장 가문의 1939년 한옥과 담장 너머 향교
의병장 정석진의 손자가 1939년에 지은 절충식 집과 고택 7채를 고쳐 연 3917마중이다. 나주배 카페와 고목 정원을 지나 향교와 서성문까지 걷는다.
나주향교와 3917마중 사이에는 담장 하나가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담 이쪽 목서원 앞마당에서 금목서가 주황빛 잔꽃을 피우고, 담 너머 향교 경내에서는 은행나무가 잎을 노랗게 물들인다. 금목서는 향이 만 리까지 간다고 해서 만리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단다. 두 터 사이로 난 고샅길에는 흙돌담이 길게 뻗어 있다. 조선 초부터 유생을 가르친 학교와 1939년에 지은 살림집이 그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계절을 맞는다.
나주는 한때 ‘작은 한성’이라 불렸을 만큼 호남의 중심이던 고을이다. 객사 금성관을 한가운데 둔 읍성의 서쪽 문 가까이에 향교와 오래된 살림집 골목이 이어진다. 3917마중은 그 골목 안에서 폐가로 버려졌던 고택 7채를 고쳐 문을 열었다. 숫자 39와 17은 집을 지은 1939년과 다시 문을 연 2017년, 1939년의 나주를 2017년에 마중한다는 뜻이다. 카페 사진 한 장으로 넘기기에는 이 터에 쌓인 내력이 길어, 가문과 집과 방과 정원을 차례로 짚어 읽을 만하다.
3917마중의 터는 4,000평에 이르고, 그 가운데 9,938㎡가 전라남도 민간정원으로 등록돼 있다. 입구 카페와 쌀창고, 고택 객실, 고목 정원이 언덕 비탈에 이어지고, 담장 밖으로 나서면 향교와 읍성 서문이 걸어서 몇 분 거리다. 정원은 목서정원과 동백정원, 회화나무 연리지정원처럼 나무를 주제로 나뉘어 비탈을 따라 이어진다. 금성관 앞 곰탕 거리를 둘러본 날 반나절을 떼어 서쪽 향교길로 옮겨 와도 넉넉한 규모다.
나주성을 지키고 을미의병에 나선 의병장, 난파 정석진
집의 내력은 1894년 나주읍성에서 시작한다. 동학농민군이 호남 고을을 잇달아 장악하던 무렵, 나주목사 민종렬은 정석진(1851~1896)을 도통장으로 세워 성의 방어를 맡겼다. 정석진은 8개월 동안 성을 지켜 냈고, 농민군이 서쪽 문을 노린 공격에도 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지금의 서성문이 그 문이다. 향교에서 147m 떨어진 지금의 문루는 2009~2011년에 다시 세웠고, 옛 기록에 남은 이름을 따 영금문 현판을 달았다.

공을 인정받아 해남 군수에 오른 그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키는 쪽으로 돌아선다. 이듬해 1월에는 나주향교를 찾아가, 이 지역은 500년 문명의 고장이니 당장 군사를 모아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유생들을 설득했다. 3917마중 담장 바로 너머, 지금도 대성전이 남은 그 경내에서 벌어진 일이다. 군수 자리에서 뒤로 의병을 돕던 그는 의병대가 관군에 진압되자 붙잡혔다. 1896년 3월에는 처형된 뒤 목이 효수되는 수모까지 겪는다.
“성패를 미리 따지고 관망만 해서는 안 된다.” 1896년 1월, 정석진이 나주향교 유생들에게 건넨 말이다.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 해는 2010년이다. 그가 생전에 머물던 언덕 위 정자는 처형 19년 뒤인 1915년, 의관을 지낸 아들 정우찬이 아버지를 기리는 제당으로 다시 지었다. 아들은 그 건물에 난초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아버지의 호를 그대로 붙였다. 난파정이다. 그 언덕 아래 손자 정덕중이 홀로 된 어머니를 위해 새 집을 올린 해가 1939년, 그러니까 정자를 다시 세우고 24년 뒤였다.

한옥 뼈대에 일본식 지붕과 서양식 사랑채를 더한 집, 목서원
1939년에 지은 목서원은 짓는 동안부터 고을 사람들의 이목을 모은 집이었단다. 설계는 박영만의 손에서 나왔다. 도쿄 성성(成城)중학교를 마치고 호남은행에 들어간 그는 학위 없이 지점과 사택 공사 현장을 돌며 설계와 감독을 익힌 사람이다. 목서원을 지은 이듬해인 1940년에는 건축 대서사 시험에 합격한다. 나무를 깎고 짜 맞추는 일은 대목장 김영창의 몫이었다.
집의 뼈대는 한옥이다. 나무 기둥과 보로 틀을 짜고 방바닥에 구들을 놓은 위에, 일본식 지붕을 얹고 서양식 사랑채를 붙였다. 안쪽에는 다다미방을 들이고 바깥으로 유리창과 현관을 내어, 한·일·양식이 한 채 안에 섞인 근대 절충식 한옥이 됐다. 2023년 전라남도는 이 집을 도 제1호 우수건축자산으로 등록했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건물 가운데 보존 가치가 큰 건축물을 시·도가 골라 관리하는 제도다.


집은 1973년까지 정씨 집안의 살림집이었다. 1960년대부터 10여 년 동안은 두 어르신이 안방을 쓰고 나머지 방마다 세입자를 들여, 한 지붕 아래 다섯 가족 30명 넘게 살았단다. 그 뒤 재일동포 출신 재력가 금하 서상록이 집을 사들여 금하장학회 건물로 쓴다. 1990년 이후로는 사람이 들지 않는 빈집이 됐고, 2015년 무렵에는 나무와 풀이 마당을 덮은 폐가였다. 살림집에서 셋집으로, 장학회 건물에서 폐가로 이어진 50여 년이다.
2015년, 나주와 아무 연고가 없던 남우진·기애자 부부가 이 폐가를 소개받았다. 부부는 목서원과 난파정이 딸린 땅을 먼저 사들인 뒤 전통문화대학교 교수를 찾아가 고증부터 받았다. 보수를 이어 가며 이웃한 고택 6채를 더 사들여 모두 7채를 고쳤다. 1967년 이 집에서 가족사진을 찍은 한 집안의 여섯 식구는 2020년 6월 다시 모여, 53년 만에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지금 7채 가운데 하룻밤 묵을 방을 내주는 곳은 난파정과 시서헌, 목서원 안의 회화목과 사랑채다.
정자와 초가형 한옥을 통째로 내주는 독채, 난파정·시서헌
난파정은 의병장을 기리던 제당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독채다. 쇠락한 뒤 한동안 평범한 가정집으로 쓰이던 건물을 2018년에 복원했다. 지금은 2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온돌방 2개와 화장실, 다이닝룸을 갖췄다. 숙박 말고도 모임이나 작은 행사, 돌잔치 사진 촬영 장소로 쓰인다. 앞 장의 내력을 알고 들어가면 대청 기둥 하나에서도 1915년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세운 제당의 무게가 느껴진다.
시서헌은 1927년에 지은 민간 한옥이다. 5칸 초가형 본채와 2칸 행랑채로 이뤄졌고, 이름은 조선 중기 나주 교동에 살던 시서 거사 김선에게서 따왔다. 1606년 사마시에 급제한 김선은 광해군 대의 어지러운 정치를 등지고 나주로 내려왔다. 읍성 서문 밖 3리 근처에 숨어 살며 1,200여 편의 시를 남겼단다. 2019년 복원한 본채는 온돌방 2개와 거실, 다이닝룸, 화장실 2개를 갖춘 독채이고, 행랑채는 2024년부터 지역 기업 팝업스토어로 쓴다.
목서원 안의 객실은 거실과 침실을 나눈 회화목, 온돌방 2개에 대청마루를 낀 사랑채 2곳이다. 본채의 나머지 공간은 세미나실과 전시 갤러리로 꾸며, 근대 한옥의 방을 그대로 전시실로 쓴다. 일행의 수와 머무는 방식에 따라 어울리는 방도 뚜렷하게 갈린다. 방을 나눠 써야 하는 일행이라면 온돌방이 2개인 사랑채나 난파정, 아침 세면 줄이 걱정이라면 화장실이 2개인 시서헌이다.

방에는 온돌방과 다다미방, 대청과 누마루가 섞여 있어 한 지붕 아래에서 서로 다른 바닥을 차례로 밟게 된다. 구들을 놓은 온돌방이 한옥의 몫이라면, 다다미방은 일제강점기 근대 주택이 남긴 흔적이다. 해가 지면 담장 너머 향교 경내가 먼저 어둑해지고, 흙돌담 고샅길에는 발소리만 남는다. 묵지 않는 여행자에게 3917마중의 문은 입구 카페에서 열리고, 그 카페 건물에도 따로 내력이 있다.
나주배 음료를 내는 카페와 고목을 다듬은 정원, 마중카페·민간정원
입구 카페는 한옥들 사이에서 혼자 현대식인 건물로, 2003년 단층 양옥이 뼈대다. 일제강점기 경주 최씨 집안의 초가가 있던 자리이고, 20년 뒤 양옥을 허물지 않은 채 세 면을 덧대어 지금의 카페로 키웠다. 간판 음료인 배차와 배 에이드는 성장촉진제 없이 기른 배를 직접 다지고 짜서 만든다. 따뜻한 배차는 단맛이 은은하게 올라오고 향이 자극적이지 않다. 창밖으로는 나주향교의 정취가 그대로 들어와, 찻잔을 든 채 담장 너머 지붕을 바라보게 된다.

다과로는 수제 양갱과 한과를 한 상에 올린 한상디저트, 견과류와 아몬드크림을 채운 크럼블파이가 있다. 레드와인에 배와 사과, 오렌지, 계피, 팔각, 정향을 넣어 2시간 끓인 뱅쇼도 낸다. 나주시 관광기념품 공모전 대상을 받은 배시시 나주배양갱은 선물 상자로도 나왔다. 찻자리는 1939년에 지은 쌀창고로 옮겨 앉아도 좋다. 지붕을 받치던 옛 서까래 아래에 앉으면 나주향교와 고샅길 흙돌담이 맞은편에 보인다.


카페 뒤편 언덕은 2021년 전라남도 민간정원 제16호, 나주시 제1호 민간정원으로 등록됐다. 바깥에서 묘목을 사다 심는 대신 원래 동산에 자라던 고목을 정리하고, 살구나무와 매화나무처럼 나주에 있던 식물을 살려 썼다. 목서원 앞 금목서와 은목서, 한 그루에서 다섯 빛깔 꽃을 피운다는 오색동백, 100년 세월을 지킨 은행나무가 정원의 뼈대다. 뿌리를 따로 내린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줄기를 맞대고 자란 연리지도 있다. 꽃밭을 새로 깔지 않고 원래 자라던 숲을 다듬은 정원이다.
정원 담장 너머가 나주향교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1398년에 세웠다고 적고, 경내 안내판은 고려 987년 창건과 1398년 중수를 정확한 기록 없이 추정으로 전한다.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을 앞에, 유생이 공부하던 명륜당을 뒤에 둔 전묘후학 배치이고, 대성전은 보물로 지정됐다. 읍성 한복판에서 사신과 중앙 관리가 묵던 객사 금성관도 보물이다. 담장 너머 향교부터 걷고 돌아와 쌀창고 찻자리에 앉으면, 방금 지나온 향교 기와지붕이 창밖에 다시 걸린다.

이 기사에 나온 곳
-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향교길 42-16
- 숙박
- 독채 난파정·시서헌, 목서원 객실 회화목·사랑채(목서원 본채 세미나실·갤러리는 대관 전용)
- 이용
- 카페 음료 가격에 정원 이용료 포함
- 요금
- 나주배배차·나주배배드링크 각 7000원, 나주배 한상디저트 1만원
- 규정
- 전 객실 취사 불가, 반려동물 입실 불가, 야외 바비큐장은 사전 문의
- 예약
- 숙박은 공식 누리집 실시간 예약, 나주배 양갱 만들기 한상은 전화 예약
- 주차
- 전용 주차장 2곳
- 문의
- 061-331-3917
-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향교길 38
- 운영
- 09:00~18:00(동절기 09:00~17:00)
- 요금
- 무료
- 주차
- 무료
- 가는 길
- 3917마중 담장 옆
- 문의
- 061-334-2369
-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서성문길 30
- 운영
- 연중무휴
- 요금
- 무료
- 주차
- 전용 주차장 없음
- 가는 길
- 나주향교에서 도보 약 150m
- 문의
- 061-339-8725
-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 8
- 지정
- 보물(조선 시대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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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다니며 여행 기사를 씁니다. 가 본 곳 가운데 다시 가고 싶은 곳만 TBAG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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