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이 열고 아홉 장터가 잇는 밤, 수원 남문시장
정조가 장사 밑천을 대어 일으킨 팔달문 아래 9개 시장이 한 덩어리로 맞물린다. 낮에는 꽈배기와 순대철판이 골목을 채우고, 10월 토요일 밤이면 차 없는 거리에 야시장 불빛이 켜진다.
수원화성 남문인 팔달문 둘레에는 시장 9개가 서로 맞붙어 있다. 수원천 물길 양쪽으로 팔달문시장과 영동시장, 지동시장, 못골종합시장, 미나리광시장이 이어진다. 여기에 남문패션1번가시장과 시민상가시장, 구천동공구시장, 남문로데오시장까지 묶어 부르는 이름이 수원남문시장이다. 정조가 새로 옮긴 수원 고을을 상업 도시로 키우려고 장사할 사람들에게 밑천을 빌려주면서 시작됐다. ‘왕이 만든 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지금도 팔달문 로터리 동쪽 일대는 수원에서 가장 큰 장터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경계 표시도 없이 옆 시장으로 넘어간다. 그래도 구역마다 주로 다루는 품목은 분명히 갈린다.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이 선정한 ‘명품점포’도 골목마다 여럿 들어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의 ‘K-관광마켓’에도 경기도 전통시장 가운데 유일하게 뽑혔다. 낮에는 꽈배기와 만두를 집어 먹으며 9개 장터를 걷고, 10월 토요일 밤이면 차 없는 거리에 야시장이 선다.
면류관 걸린 지붕 아래 꽈배기와 떡, 팔달문시장
반원형 옹성이 성문을 감싼 팔달문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팔달문시장 입구다. 아케이드 안으로 들어서서 위를 보면 임금이 의식 때 쓰던 면류관과 도장인 옥새 모양 조형물이 천장에 걸려 있다. 왕실이 밑천을 대어 일으킨 장터라는 내력을 표시해 둔 장식이다.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김도넛’과 ‘중앙떡집’이 간판을 나란히 걸고 있다. 김도넛은 매대 앞 기름 솥에서 찹쌀꽈배기와 팥도넛, 야채빵을 바로 튀겨 낸다. 장바구니를 든 동네 주민과 외지 방문객이 함께 줄을 서서 봉지째 사 간다. 4개를 한 봉지에 담아도 부담 없는 값이라 시장 구경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씩 집어 들기 알맞다.

바로 옆 중앙떡집 매대에는 인절미와 개피떡, 절편, 시루떡이 팩 단위로 쌓여 있다. 제사나 잔치 떡을 맞추는 단골뿐 아니라 오가며 먹을 간식으로 한 팩만 사는 손님도 많다. 갓 튀긴 꽈배기 집과 떡집이 붙어 있어 입맛대로 골라 나누기 좋다.
잠옷 거리에서 100년 한복 상가로, 남문패션1번가와 영동시장
팔달문시장 골목을 따라 안으로 더 걸으면 먹거리 가게가 끝나고 양옆으로 옷가게가 이어진다. 바닥이나 천장에 따로 경계가 없어 걷는 동안 시장이 바뀐 줄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여기서부터 ‘남문패션1번가시장’과 ‘시민상가시장’이다. 시민상가시장은 과거 수원시가 직접 건물을 세워 상인들에게 임대한 ‘시민백화점’에서 비롯됐는데, 경기도 최초의 백화점으로 꼽힌다.

남문패션1번가 골목에는 외출복보다 집에서 입는 옷을 파는 가게가 많다. 요즘은 값싼 순면 잠옷 세트와 때수건, 목욕가방 같은 사우나 용품을 찾으러 오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에서는 보기 힘든 인견 바지와 일바지도 옷걸이마다 걸려 있다.

옷가게 골목에서 수원천 쪽으로 나가면 건물 간판에 ‘SINCE 1919’를 내건 ‘영동시장’이다. 100년 넘게 이어진 한복 특화 시장이다. 복도 천장마다 ‘주단’이라 적힌 둥근 간판이 걸려 있다.
주단은 명주와 비단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한복집 사이사이에 이불과 베개 같은 침구류, 원단 가게가 섞여 있다. 건물 2층에는 청년 상인들이 공방과 카페, 식당을 꾸린 ‘28청춘 청년몰’이 들어섰다.
다리 건너 김 오르는 만두와 철판 볶음, 지동시장
영동시장 앞 수원천에 놓인 지동교를 건너면 지동시장이다. 다리 끝 미나리광시장과 만나는 모퉁이에 만두를 쪄 내는 ‘추억의 장날만두’가 있다.

가게 앞 큰 찜기에서 고기만두와 김치만두를 연신 쪄 낸다. 주문하면 스티로폼 도시락에 담아 주는데, 지동교 난간 근처에서 식기 전에 집어 먹는 사람도 많다. 한 팩 양이 넉넉하니 뒤에 들를 식당을 생각하면 둘이 나눠 먹는 편이 낫다.

만두집 뒤쪽 지동시장 건물 한쪽에는 ‘순대곱창타운’ 입구가 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순대와 곱창을 다루는 식당 40여 곳이 바둑판처럼 모여 있다. 손님 대부분은 무쇠 판에 순대와 곱창, 양배추, 당면, 깻잎을 넣고 매콤하게 볶아 내는 순대곱창볶음을 주문한다. 다 먹은 뒤 남은 양념에 김 가루와 참기름을 넣고 볶아 주는 밥도 별미다.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면 백순대나 순대국밥을 고르면 된다.
뻥튀기 소리와 상인 합창단의 기억, 못골종합시장
지동시장에서 옛 미나리밭 터에 들어선 미나리광시장을 지나면 동네 장보기 시장인 ‘못골종합시장’이 나온다. 옛날 연못이 있던 골짜기라 못골이라 불렀다.

입구에는 뻥튀기 기계를 돌리는 ‘남문뻥튀기’가 있다. 쌀과 강냉이, 서리태, 율무를 튀겨 큰 비닐봉지에 담아 파는 가게다. 길이 200m 남짓한 좁은 골목 양쪽으로는 제철 과일과 채소, 반찬, 두부, 정육, 생선 가게 80여 곳이 촘촘히 붙어 있다.

못골종합시장은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예술로 전통시장을 살리려고 벌인 ‘문전성시’ 사업의 첫 시범시장으로 뽑힌 곳이다. 그때 상인과 손님이 함께 합창단을 꾸렸고, 시장 안에서 라디오 방송국도 직접 운영했다. 그 경험이 알려져 전국 전통시장 상인회가 견학하러 찾아오는 시장이 됐단다.
무쇠 가마솥 기름 소리와 왕갈비 양념, 수원통닭거리
지동교에서 수원천 산책로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 정조로를 건너면 ‘수원통닭거리’다. 1970년대 문을 연 매향통닭을 비롯해 진미통닭, 용성통닭, 남문통닭 등 통닭집 40여 곳이 강변 골목에 줄지어 있다.
이 골목 노포들은 주방 앞에 건 큼직한 무쇠 가마솥에서 생닭을 튀긴다. 가마솥이 열을 오래 붙잡아 두어 차가운 닭을 넣어도 기름 온도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닭을 튀길 때 통마늘과 닭 모래집을 함께 튀겨 얹어 주는 것도 이 거리 방식이다.

가마솥 후라이드와 함께 외지 손님이 많이 찾는 메뉴가 ‘수원왕갈비통닭’이다. 수원은 1940년대 싸전거리 해장국집으로 출발한 화춘옥이 1956년 소금과 설탕 양념 위주의 소갈비를 내놓으며 왕갈비 고장으로 이름났다. 영화 〈극한직업〉에 나와 알려진 왕갈비통닭을 파는 대표적인 집이 거리 입구의 ‘남문통닭’이다. 튀긴 통닭에 달콤짭조름한 갈비 양념을 입히고 채 썬 대파를 올려 작은 가마솥 모양 그릇에 담아 준다. 함께 나오는 모닝빵을 반으로 갈라 살코기와 양배추 샐러드를 끼워 먹는 재미도 있다.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 불취무귀 야시장
해마다 10월 매주 토요일 밤이면 팔달문 고객지원센터 광장부터 지동교까지 차 없는 거리와 아케이드에 ‘불취무귀(不醉無歸)’ 야시장이 열린다.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고전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조가 신하들과 술자리를 열 때 한 말로도 전한다.

해가 지기 전부터 차 없는 거리 한가운데로 시장 상인들이 운영하는 ‘남문장터’ 먹거리 매대가 들어선다. 낮에 팔달문시장에서 본 중앙떡집도 이곳에 나와 꿀떡과 인절미를 판다. 옆 매대에는 돼지껍데기 무침과 닭발, 야채볶음, 구운 김이 준비돼 있다. 사 온 음식은 야외 취식 구역인 ‘야장마당’ 테이블에 앉아 먹을 수 있다.
정조가 상인들에게 밑천을 빌려주어 일으킨 성밖 장터에, 200여 년 뒤 가을밤마다 다시 불이 켜진다.
야시장 무대 한쪽에서는 DJ가 옛 가요와 힙합, K팝, 일렉트로닉 음악을 번갈아 들려준다. 개막 주간에는 정조대왕 행차 재현 행렬이 화성행궁 신풍루를 출발해 통닭거리를 거쳐 지동교 무대까지 행진한다. 같은 기간 지동교에서는 상인들이 내놓은 물품을 경매하는 ‘수원남문시장거리축제’도 함께 열린다. 팔달문 고객지원센터 앞 ‘K-관광마켓 스마일 캠페인’ 부스에 당일 구매 영수증을 내면 바우처와 장바구니가 걸린 룰렛도 돌릴 수 있다.
리플릿이나 부스에 있는 QR코드로 ‘모바일 스탬프 투어’에도 참여할 만하다. 시장에서 산 당일 영수증을 올리고, 골목 곳곳에 증강현실(AR)로 숨겨 둔 ‘왕의 하사품’ 3가지를 모으는 미션이다. 단계를 풀수록 등급이 ‘취한자’에서 ‘흥부자’를 거쳐 ‘무아지경’으로 올라가며, 스탬프를 다 모으면 부스에서 할인쿠폰을 받는다. 낮에는 팔달문시장부터 못골종합시장까지 걸어서 돌고, 해 질 무렵 차 없는 거리로 나가면 하루 코스가 알맞게 이어진다.
이 기사에 나온 곳
- 주소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776번길 8 일대
- 운영
- 점포별 상이(대체로 09:00~20:00)
- 요금
- 김도넛 찹쌀꽈배기·도넛 4개 3000원, 야채빵 2개 3000원 / 중앙떡집 떡 1팩 3000~5000원 선
- 휴무
- 점포별 상이(연중무휴 점포 다수)
- 주차
- 팔달문시장 공영주차장·남문 공영주차장
- 문의
- 031-252-0042(팔달문시장 상인회)
- 주소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255번길 6(영동시장)
- 운영
- 09:30~19:30(점포별 상이, 28청춘 청년몰 11:00~20:00)
- 휴무
- 매월 첫째·셋째 일요일 또는 점포별 상이(청년몰 월요일 휴무 점포 다수)
- 주차
- 영동시장 공영주차장
- 문의
- 031-251-0171(영동시장)
- 주소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8번길 9(지동시장)
- 운영
- 순대곱창타운 09:00~22:00 / 추억의 장날만두 08:30~20:00(재료 소진 시 마감)
- 요금
- 추억의 장날만두 1인분 5000원 / 철판 순대곱창볶음 1인분 1만 2000~1만 3000원 선(2인 이상 주문)
- 휴무
- 연중무휴(점포별 교대 휴무)
- 주차
- 지동시장 공영주차장
- 문의
- 031-256-0202(지동시장 상인회)
- 주소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성로20번길 14(못골종합시장)
- 운영
- 08:00~20:00(점포별 상이)
- 요금
- 남문뻥튀기 곡물 과자 1봉지 4000원, 제철 과일·반찬류 점포별 상이
- 휴무
- 매월 첫째·셋째 일요일 일부 점포 휴무
- 주차
- 못골시장 공영주차장·지동교 주변 공영주차장
- 문의
- 031-246-5638(못골종합시장 상인회)
- 주소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800번길 16(남문통닭 본점 일대)
- 운영
- 11:30~23:00(점포별 상이)
- 요금
- 가마솥 후라이드·양념통닭 1만 9000~2만 1000원 선 / 남문통닭 수원왕갈비통닭 2만 3000원 선
- 휴무
- 점포별 상이(연중무휴 또는 화요일 휴무 점포 확인)
- 주차
- 화성행궁 공영주차장 또는 매향교 주변 유료주차장
- 문의
- 031-241-6688(남문통닭), 031-255-3401(진미통닭)
- 주소
-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문로 9(팔달문 고객지원센터~지동교 일원)
- 운영
- 매년 10월 매주 토요일 17:00~22:00(연도별 상인회 공지 확인)
- 요금
- 입장 무료 / 남문장터 부스 먹거리 1팩 4000~1만 원 선
- 가는 길
- 수원역 4번 출구 정류장에서 시내버스 탑승 후 팔달문 하차 도보 3분
- 문의
- 031-251-0171(영동시장 상인회), 031-231-3361(수원도시재단 상권활성화센터)
2026년 10월 기준 정보입니다. 운영시간과 요금은 바뀔 수 있으니 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전국을 다니며 여행 기사를 씁니다. 가 본 곳 가운데 다시 가고 싶은 곳만 TBAG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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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여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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