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왕산 계곡과 미술관을 걷고 한옥에 묵는 서촌
겸재 정선이 그린 골짜기에서 화가의 옛집과 시인의 일화가 전하는 옛 여관, 경찰 초소였던 책방까지 걸은 뒤 골목 안 도시 한옥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서촌의 물길은 인왕산 동쪽 기슭 골짜기에서 시작된다. 옥류동천이라 불린 이 물줄기는 옛 양반가 골목 한복판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렀지만, 도시가 넓어지는 동안 하류 대부분이 땅 밑으로 덮였다. 1920년대 무렵 큰 저택이 헐린 자리에는 ㅁ자 도시 한옥이 들어섰고, 지금은 그 사이로 한옥을 고친 숙소와 책방, 미술관이 섞여 든다.
이번 서촌 산책은 궁궐 담장 바깥, 골목 안 장소들이 거쳐 온 내력을 따라간다. 아파트 9개 동에 가려졌던 골짜기는 조선 후기 화가의 그림을 근거로 물길을 되찾았다. 친일 고관이 딸에게 지어 준 근대 가옥은 화가의 집을 거쳐 구립 미술관이 되었고, 시인이 묵었다는 옛 여관에서는 전시와 공연이 열린다. 청와대를 지키던 경찰 초소에도 지금은 환경 분야 책이 꽂힌 서가가 들어섰다.
산책 공간 4곳 가운데 3곳은 서촌 골목과 궁궐 서쪽 길에 있고, 경찰 초소였던 책방은 인왕산 자락의 길가에 자리한다. 걸음을 멈추고 하룻밤을 묵는 자리는 골목 안 도시 한옥을 고친 숙소 3곳으로 이어진다. 혼자 책을 읽을 다락이 필요한 사람, 침실을 둘로 나눠 쓰려는 4인 일행, 방 안에서 영화와 족욕으로 밤을 보내려는 사람에게 각각 맞는 집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길잡이로 되살린 골짜기, 수성동계곡
인왕산 동쪽 기슭, 옥인동 맨 윗자락의 골짜기를 옛사람은 물소리가 맑고 크다 하여 물 수(水)에 소리 성(聲)을 붙여 불렀다. 한양도성 안에서 산과 궁궐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자리라, 조선의 왕족과 사대부가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누며 여름을 나던 명승지다. 추사 김정희도 비 내리는 날 이곳 물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단다. 19세기 학자 유본예가 한양의 궁궐과 관청, 명승을 묶어 펴낸 《한경지략》도 이 골짜기를 빼어난 경치로 꼽는다.


1971년 골짜기 양옆으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올라서면서 옛 경치는 콘크리트 벽 뒤로 가려졌다. 2010년 낡은 아파트를 헐던 중에 겸재 정선이 《장동팔경첩》의 〈수성동〉에 그려 넣은 돌다리가 그 자리에서 드러났다. 기린교다. 길이 3.8m 장대석 2개를 맞붙여 놓은 구조로, 한양도성 안에서 원형 그대로 남은 유일한 통돌다리란다. 서울시는 공원으로 다듬으려던 계획을 거두고 그림을 길잡이 삼아 바위와 물길을 되살렸으며, 2012년 지금의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아파트를 헐어 낸 자리에서 그림 속 돌다리가 드러나자, 서울시는 공원 계획을 접고 옛 골짜기를 되살렸다.
다만 지금의 수성동은 평소 바닥이 마른 건천이라, 물소리를 들으려면 많은 비가 내린 뒤를 골라야 한다. 복원 구간도 190m 남짓이어서 물놀이 자리보다는 너른 바위에 앉아 쉬어 가는 짧은 산책길에 가까운 곳이다. 안평대군의 집 비해당도 이 골짜기 어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 일대는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돼 관리된다. 계곡 옆으로는 청운공원과 사직근린공원을 잇는 인왕산 자락길 무장애 구간 2.5km가 지나, 유모차나 휠체어로도 산자락을 걸을 수 있다. 자락길 위쪽에는 서촌과 경복궁, 청와대 일대를 내려다보는 무무대 전망대도 있다.
1930년대 후반 절충식 가옥에 화가의 그림과 수석을 남긴 곳,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수성동에서 물길이 흐르던 쪽으로 5분 남짓 내려오면 옥인동 골목 안에 정원을 둔 2층 근대 주택이 나온다. 1930년대 후반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었다는 집으로, 온돌방 곁에 벽난로를 들인 응접실을 붙여 한식과 양식의 살림을 한 건물에 묶었다. 한옥과 양옥의 짜임을 섞은 이런 건물을 절충식 가옥이라 하며, 지금은 ‘옥인동 박노수 가옥’이라는 이름의 서울특별시 문화유산자료다. 한국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근대 서울 부유층의 살림집 자체를 보러 들를 만하다.

남정 박노수(1927~2013)는 1970년대 초 이 집에 들어와 세상을 떠난 2013년까지, 그러니까 40년 안팎을 살며 그림을 그렸다. 화백은 집과 정원, 작품과 수석, 고미술품 1000여 점을 종로구에 기증했고, 미술관은 2013년 9월 문을 열었다. 현대 동양화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 화가의 작품은 옛 살림방을 고친 전시실에 걸린다. 화백이 곁에 두고 아끼던 수석과 고미술품까지 남긴 덕에, 관람객은 그림과 함께 화가의 수집 취향까지 따라 읽는다. 근대 주택의 실내와 한국화를 한 번에 보려는 사람에게 먼저 권할 만한 곳이다.
서정주의 《시인부락》 일화가 전하는 옛 여관 문화공간, 통의동 보안여관
통의동 보안여관은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과 효자로 하나를 사이에 둔 길가의 옛 숙박업소다. 1936년 서정주가 이곳에 묵으며 김동리, 오장환, 함형수와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꾸렸단다. 동인지는 2호를 끝으로 멈췄지만, 여관 이름은 이 일화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진다. 서촌은 조선 시대 왕족과 사대부, 중인이 모여 살던 동네이고, 모더니즘 시인 이상이 3세부터 20년 가까이 살던 집터도 이 일대에 있다.
여관 영업을 접은 뒤 이곳은 전시와 공연이 열리는 문화공간이 되었고, 지금은 보안1942라는 이름을 내건다. 이름 속 숫자는 건물 보수 과정에서 나온 상량문의 연도, 1942년을 딴 것이다. 옛 여관 공간에서는 기획 전시가 열리고, 곁에 새로 올린 신관에는 책방과 카페가 들어섰다. 근대문학 일화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서촌 산책에 함께 묶을 만하다.
50년 넘게 경찰이 지키던 청와대 방호 초소를 고친 숲속 서가, 인왕산 초소책방
1968년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 코앞까지 내려온 1·21 사태 이후, 정부는 인왕산 일대를 군과 경찰이 지키는 통제 구역으로 묶었다. 인왕산로 길가의 이 초소도 그 뒤로 청와대 방호를 맡아 50년 넘게 경찰이 지키던 시설이다. 종로구는 2020년 이 건물을 고쳐 숲속 책방 겸 카페로 문을 열었고, 경계 근무를 서던 초소는 누구나 들르는 쉼터가 되었다.
서가에는 환경 분야 도서를 주로 골라 꽂고, 한쪽에서는 커피와 차를 내어 산길을 걷던 사람이 잠시 숨을 고른다. 카페와 책방을 한 지붕 아래 둔 복합문화공간이라, 책을 고르지 않고 차 한 잔만 마시고 일어서도 그만이다. 정상까지 오를 생각 없이 인왕산 중턱까지만 걸어 보려는 사람에게 알맞다. 문을 연 뒤로는 서촌을 찾는 여행자 사이에서 손꼽히는 인왕산 쉼터로 자리 잡았다.
골목 안 도시 한옥을 고친 숙소 3곳, 소소하우스·스테이 데이오프·하은재
서촌의 도시 한옥은 대개 작은 필지에 ㅁ자로 방을 두르고 가운데 마당을 비운 집이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과 처마를 맞댄다. 지금도 대부분의 집에는 주민이 살고, 그 틈에 옛집을 손본 숙소와 식당, 카페, 편집숍이 하나둘 섞여 든다. 같은 틀의 집을 고친 숙소라도 마당을 어떻게 쓰고 방을 어떻게 나눴는지에 따라 하룻밤의 결이 달라진다. 소소하우스와 스테이 데이오프, 하은재는 같은 틀 안에서 다락과 사과나무, 침실 2개와 사우나, 프로젝터와 족욕기로 쓰임을 갈랐다.

사과나무 마당과 다락을 둔 100년 도시 한옥, 소소하우스
소소하우스는 100여 년 된 도시 한옥을 건축가 부부가 고쳐 문을 연 숙소로, 그 전에는 오랫동안 미술관으로 쓰였다. 대문과 건물, 이웃집 외벽을 겸한 높은 담이 작은 마당을 사방에서 막아서 바깥 시선이 들지 않고, 하늘만 위로 트인다. 마당 한쪽에는 사과나무가 자라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가 맺힌다. 햇살이 내려앉은 툇마루와 목조 기둥 곁에는 작은 소품이 과하지 않게 제자리를 지킨다.

거실은 바닥에 앉아 쉬는 대청과 식탁에서 밥을 먹는 주방으로 쓰임을 나눠, 좌식 생활이 낯선 사람도 식사만큼은 의자에 앉아 할 수 있다. 한 공간을 둘로 갈라 한옥식 대청과 현대식 주방을 나란히 두었는데도, 두 쪽의 분위기가 어긋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안방은 목조 선반과 창호를 바른 한옥식 창이 둘러싸 차분하고 포근한 기운이 감돈다.

욕실 위에 올린 다락에는 창가 쪽으로 탁자를 붙여 두어, 일행과 떨어져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좋다. 다락의 작은 창으로는 마당이 내려다보인다. 화장실은 파우더룸을 사이에 두고 2개로 나눴고, 욕실은 100년 된 건물과 달리 현대식으로 마감했다. 물을 쓰는 공간 위로 다락을 포개 올려 작은 집의 높이를 알뜰하게 나눠 쓴 셈이다.


떨어진 침실 2개와 건식 사우나를 들인 한옥, 스테이 데이오프
스테이 데이오프의 이름은 영어로 쉬는 날을 뜻하는 ‘데이 오프(day off)’에서 왔다. 마당 조경과 가구, 침구, 실내의 향까지 분야별 전문가와 함께 꾸렸고, 한옥 뼈대를 살린 채 한쪽에 건식 사우나를 들였다. 서로 떨어진 침실 2개에 최대 4명까지 묵을 수 있어, 두 쌍이 함께 오는 일행이 잠자리를 나누기 좋은 구조다. 다만 건식이라 기기에 물을 부어 증기를 올릴 수는 없으니, 습식 사우나를 기대했다면 미리 알아 두자.
정약용의 글 속 은자의 거처를 본뜬 한옥, 하은재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절 제자 황상에게 〈제황상유인첩〉을 써 주며 숨어 사는 선비가 머물 집과 정원의 모습을 그렸다. 하은재는 그 글 속 거처를 바탕으로 꾸민 한옥으로, 가운데 마당 둘레로 장식을 덜어 낸 방이 이어진다. 화려한 소품 대신 스피커와 프로젝터, 족욕기를 들여서, 손님은 방 안에서 음악을 틀거나 영화를 보며 발을 담근다. 네모반듯한 목조 가구를 균형 있게 놓아 방마다 여백이 넉넉하다. 바깥 구경보다 방 안에서 밤을 오롯이 보내려는 사람에게 맞는 숙소다.
이 기사에 나온 곳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85-3 일대
- 이용
- 상시 개방
- 요금
- 무료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1길 34
- 운영
- 화~일요일 10:00~18:00(입장 마감 17:30)
- 휴무
- 월요일, 1월 1일·설날·추석 당일
- 요금
- 성인 3000원, 청소년 1800원, 어린이 1200원
- 가는 길
- 수성동계곡 초입에서 도보 약 5분
- 문의
- 02-2148-4171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33
- 운영
- 전시 화~일요일 12:00~18:00, 보안책방 화~금요일 12:00~20:00·주말 12:00~19:00
- 휴무
- 월요일(전시·보안책방)
- 가는 길
- 경복궁 영추문 건너편
- 문의
- 02-720-8409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로 172
- 운영
- 08:00~22:00, 연중무휴
- 가는 길
-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 자락길을 따라 도보
- 주차
- 책방 앞 주차 공간 협소
- 문의
- 02-735-0206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5가길 16-5
- 객실
- 하루 한 팀 독채 이용
- 가는 길
- 경복궁역 2·3번 출구에서 도보 약 10분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다길 6
- 객실
- 독립 침실 2개, 최대 4명
- 주차
- 전용 주차장 없음(인근 공영주차장 이용)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68-10
- 문의
- 010-4953-6039
2026년 10월 25일 기준 정보입니다. 운영시간과 요금은 바뀔 수 있으니 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전국을 다니며 여행 기사를 씁니다. 가 본 곳 가운데 다시 가고 싶은 곳만 TBAG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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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마지막 기사입니다2026년 11월호 처음으로 돌아가기2026년 11월호 차례 기사 8편 · 모두 읽으면 약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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