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목장 메밀밭부터 돌박물관까지, 제주 조천 4곳
주민 20여 명이 내놓은 옛 방목지에 하얀 메밀꽃과 현무암 밭담길이 이어진다. 남조로와 비자림로를 따라 제주돌문화공원, 교래자연휴양림 곶자왈, 산굼부리 억새 분화구까지 하루에 묶었다.

제주 메밀은 봄과 가을, 1년에 2차례 꽃을 피운다. 씨를 뿌리고 서너 달이면 거둘 수 있어 5월 중순과 10월에 구릉마다 하얀 꽃밭이 펼쳐진다. 전국 메밀 재배 면적의 62%가 제주에 몰려 있고, 그중 조천읍 와흘리는 주민들이 옛 목장 땅을 합쳐 가꾸는 중산간 마을이다.
제주국제공항에서 남조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20km쯤 달리면 조천읍 와흘리와 교래리 일대 중산간에 들어선다. 마을 공동 메밀밭을 시작으로 화산석 박물관, 곶자왈 원시림, 억새 덮인 함몰 분화구가 차로 5~15분 거리에 모여 있다. 오전 메밀밭 산책부터 해 질 녘 억새 능선까지 하루 동선으로 묶어 돌기 알맞다.
주민 20여 명이 내놓은 옛 방목지와 밭담 산책로, 와흘메밀마을
구그네오름과 세미오름이 감싼 와흘리 구릉에는 약 33만 ㎡, 그러니까 축구장 46개를 합친 넓이의 메밀밭이 펼쳐져 있다. 본래 이 땅은 마을 사람들이 소를 풀어 기르던 공동목장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는 집 외양간에서 소를 먹이다가 봄이면 이곳에 방목하고 가을에 다시 데려갔단다.

목장이 지금 같은 경관 농지로 바뀐 건 일대 지주 20명가량이 마을에 땅을 내놓으면서부터다. 주민들이 영농조합법인과 마을협의회를 꾸려 땅을 합쳤고, 지금도 구획을 나누지 않은 채 함께 씨를 뿌리고 거둔다. 2017년부터는 마을 가공센터에서 수확한 메밀로 누룽지와 베개 같은 제품도 직접 만든다.
메밀은 씨를 뿌린 뒤 70~90일이면 수확할 수 있어 병충해가 적고 농약을 치지 않는다. 물 빠짐이 심한 화산회토와 자갈밭에서도 잘 자라, 논농사가 귀한 제주에서 오래도록 구황작물이 되어 준 곡식인 셈이다.

밭 한가운데로는 검은 현무암을 낮게 쌓은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본래 제주 밭담은 이웃 밭과 경계를 나누고 거센 바람에 흙이 날리는 것을 막는 농업 시설이다. 섬 전역의 밭담 길이를 합치면 2만 2000km가 넘어 2014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세계중요농업유산에 올랐다.
하지만 마을이 공동 경작하는 와흘 메밀밭에는 땅을 가를 경계선이 필요 없다. 농사만 생각하면 기계가 오가기에 돌이 없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방문객이 꽃을 밟지 않고 걸으며 제주 돌담 정취를 볼 수 있도록 주민들이 일부러 길을 내고 담을 쌓았다.
화산송이와 현무암 부스러기가 깔린 산책로를 따라가면 커다란 팽나무 그늘과 나무 그네, 돌 아치, 통나무 의자가 차례로 나온다. 메밀꽃은 꽃잎이 작고 줄기와 잎이 푸르러, 유채꽃밭처럼 밭 전체가 원색으로 빽빽하게 덮이지는 않는다. 원색 꽃밭을 기대하면 수수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출발 전 마을 누리집(waheul.com) 실시간 카메라로 개화 상태를 먼저 확인할 것.
농경신 자청비 신화와 장터 메밀 한 상, 와흘본향당·와흘메밀문화장터
제주에서는 메밀을 ‘자청비 할망의 곡식’이라 부른다. 제주 무속 서사무가 〈세경본풀이〉에는 농경신 자청비가 하늘 옥황상제에게서 오곡 씨앗을 받아 땅으로 내려온 이야기가 전한다. 이때 처음에는 메밀 씨앗을 빠뜨리고 내려왔단다. 다시 하늘로 올라가 사흘 밤낮을 무릎 꿇고 빌자 옥황상제가 한 가지 시험을 냈다.

꽃 99가지 가운데 푸른색과 흰색,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까지 5가지 빛깔을 모두 지닌 꽃을 찾아오라는 조건이었다. 자청비가 온 산을 헤매다 마침내 그 꽃을 찾아내자 하늘에서 메밀 씨앗이 쏟아졌다고. 농촌진흥청 자료도 메밀을 푸른 잎과 붉은 줄기, 하얀 꽃, 검은 열매, 노란 뿌리의 오방색 작물로 소개한다.
이 신화는 마을 초입에 있는 ‘와흘본향당(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유산)’ 제의와도 이어진다. 지금도 음력 정월과 7월이면 주민들이 신당에 모여 한 해 농사의 풍요를 빈다. 심방(무당)이 굿판에서 〈세경본풀이〉를 구연하며 자청비 일대기를 읊는 전통이 마을 축제인 ‘자청비 와흘 메밀문화제’의 모태가 됐다.

개화 시기에 맞춰 문화제가 열리면 방문자센터 옆 장터에서 주민들이 직접 만든 메밀 음식을 낸다. 쇠고기 고명을 얹은 메밀국수와 얇은 메밀전에 무채를 말아 낸 빙떡이 대표 메뉴다. 고소한 메밀전병과 설탕을 뿌려 노릇하게 지진 기름떡도 한 쟁반에 담아 판다. 위생과 신선도를 지키려고 그날 남은 음식은 모두 폐기하고 다음 날 새로 반죽을 준비한다는 것이 마을 사무장의 설명이다.
체험관에서는 옛 제주 어르신들이 쓰던 메밀베개 만들기를 비롯해 빙떡·메밀묵·쿠키 만들기 프로그램이 예약제로 열린다. 바싹 말린 메밀 껍질을 베갯속에 채워 넣는 방식인데, 껍질 사이로 공기가 잘 통해 여름에는 열기를 식혀 주고 겨울에는 온기를 붙잡아 준다. 문화제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도 메밀밭 산책로는 무료로 열어 두어 호젓하게 밭담길을 걸을 수 있다.
매립장 위에 세운 지하 박물관과 지름 40m 옥상 연못, 제주돌문화공원
와흘메밀마을에서 남조로를 따라 남쪽으로 4km쯤 내려가면 교래리 곶자왈 지대에 들어선 ‘제주돌문화공원’이 나온다. 제주시 아라동에서 ‘탐라목석원’을 운영하던 백운철 원장이 평생 모은 자연석과 민속품 1만 4000여 점을 내놓은 것이 출발점이다. 당시 북제주군이 부지와 예산을 맡아 1999년 협약을 맺었고, 백 원장이 돌을 찾으려고 차로 달린 거리만 100만 km가 넘는다.

매표소에서 숲길과 전설의 통로를 지나면 시야가 트이며 원형 수공간이 나타난다. 하늘연못이다. 지름 40m, 둘레 125m 규모로, 설문대할망이 오백 아들에게 먹일 죽을 끓이다 빠졌다는 죽솥과 물장오리오름, 한라산 백록담을 상징한다.
발아래 수면은 사실 건물 옥상 지붕이다. 주변 곶자왈 경관을 가리지 않으려고 1989년 말부터 10년 동안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던 구덩이 지형을 살려 ‘돌박물관’을 지하에 넣었다. 연못 아래 전시실로 내려가면 제주 화산 지형 형성 과정부터 용암구와 화산탄, 사람 얼굴을 닮은 두상석까지 화산석 수백 점을 돌아본다.

박물관 뒤편에는 2025년 6월 문을 연 ‘설문대할망전시관’이 있다. 역사관에는 높이 10m 영상관이 들어섰고, 신화관 2곳과 민속 전시실에서는 제주 창조신화와 무속, 여성 생활사, 허벅을 다룬다. 다만 하늘연못은 안전 관리상 2025년 6월 중순부터 가로지르기 통로를 막아 두어, 물 한가운데서 찍는 사진만 기대하면 아쉽다.
10년 동안 생활쓰레기를 묻던 구덩이 위에 지하 돌박물관을 앉히고, 그 옥상에 지름 40m 연못을 채워 하늘과 오름을 비췄다.
신화 줄거리를 따라 세운 바위 군상과 모자상 용암석, 오백장군 군상·어머니의 방
돌박물관에서 야외 산책로로 나서면 걷는 순서가 곧 설문대할망 신화의 줄거리가 된다. 잔디 광장에는 액운을 막는 방사탑을 본뜬 원뿔형 현무암 돌탑 3기와 제단이 서 있고, 그 뒤로 거대한 자연석 기둥들이 숲을 배경으로 늘어선다.

큰 몸통 바위 위에 사람 머리를 닮은 자연석을 하나씩 얹어 세운 ‘오백장군 군상’이다. 설문대할망이 죽솥에 빠진 줄도 모르고 죽을 먹은 아들들이 뒤늦게 어머니의 뼈를 본 뒤 피눈물을 흘리다 영실 바위가 됐다는 전설을 담았다. 근처 ‘오백장군갤러리’에서는 회화와 조각, 사진 등 제주 예술가들의 기획전이 철마다 이어진다.

오백장군 군상을 지나 억새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가면 둥근 돌집인 ‘어머니의 방(용암석전시관)’이 나온다. 오직 자연 용암석 1점을 보여주려고 지은 공간이다. 받침돌 위에 선 거친 용암석이 어린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를 빼닮았고, 조명을 받은 돌 뒤쪽 곡선 벽면에 모자상 그림자가 또렷하게 드리운다.
야외 전시장에는 돌하르방과 동자석, 무덤을 지키던 문인석, 화덕 구실을 하던 정주석과 말 방앗간인 연자매까지 돌 유물이 모였다. 옛집 자재를 그대로 살려 복원한 전통 초가 마을 ‘돌한마을’까지 걸어서 다 돌아보려면 2~3시간이 훌쩍 지난다. 동선이 길어 부담스럽다면 주요 거점을 순환하는 공원 유료 전동차를 타거나 관심 있는 코스만 골라 돌 것.
화산 암괴 요철 위 양치식물 숲길과 초가 숙소, 교래자연휴양림
제주돌문화공원과 같은 도로명 주소를 쓰는 바로 옆 숲은 제주 최초의 자연휴양림인 ‘교래자연휴양림’이다. 제주의 허파로 불리는 화산 지형 ‘곶자왈’ 한가운데 조성된 숲이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자갈·바위 무더기를 뜻하는 ‘자왈’을 합친 말이다.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지며 쌓인 지대다.

땅이 움푹 꺼진 함몰지와 바위 돌출지가 불규칙하게 이어져 빗물이 지하로 곧장 스며든다. 바위 틈이 겨울에는 땅열을 머금어 따뜻하고 여름에는 습기를 유지해 서늘하다. 그 덕분에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한 숲에서 함께 자란다.
휴양림 안에는 왕복 2.5km의 ‘생태관찰로’와 큰지그리오름 정상까지 다녀오는 ‘오름산책로’가 나 있다. 생태관찰로로 들어서면 초록 이끼가 두껍게 덮인 화산 바위와 고사리류 양치식물 사이로 좁은 돌길이 이어진다. 숲 안쪽에는 옛사람들이 참나무로 숯을 굽던 가마터와 화전민 움막 터 흔적도 남아 있다.
입구 쪽 숙박 구역에는 제주 전통 초가 지붕 모양을 살려 지은 ‘숲속의초가’ 숙박동과 야영장이 있다. 조용한 원시림에서 하룻밤 묵어 가거나 돌문화공원 관람 뒤 1시간 남짓 숲길을 걷기에 알맞다. 다만 바닥에 울퉁불퉁한 화산석과 굵은 나무뿌리가 그대로 드러난 구간이 많으니 굽이 낮은 운동화나 등산화를 신어야 발목이 편하다.
깊이 132m 함몰 분화구 둘레를 덮은 억새 물결, 산굼부리
교래사거리에서 비자림로를 따라 동쪽으로 4km쯤 달리면 천연기념물 ‘제주 산굼부리 분화구’가 나온다. 제주어로 분화구를 뜻하는 ‘굼부리’가 이름에 붙었지만, 가파른 봉우리를 오르는 일반 오름과는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 평지처럼 완만한 비탈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정상부에서 갑자기 땅이 통째로 꺼진 거대한 구덩이가 나타난다.

바깥 둘레 약 2067m, 지름 600m 남짓, 깊이 132m에 이르는 분화구다. 한라산 백록담보다 깊고 넓은데도 바닥에 물이 고이지 않는다. 빗물이 분화구 내벽의 구멍 뚫린 현무암층으로 곧장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국가유산청 지정 자료는 짧은 가스 폭발로 구멍만 뚫린 ‘마르(Maar)’형 분화구로 설명한다. 반면 제주시 지질 조사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지하 마그마가 빠져나간 빈 공간 위로 지반이 내려앉은 피트(Pit)형 함몰분화구로 분류한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분화구 안쪽은 식물 450여 종이 자라는 격리된 숲이다. 해가 잘 드는 북쪽과 서쪽 사면에는 붉가시나무와 생달나무 같은 난대 상록활엽수가 자란다. 반대로 그늘이 지는 남쪽 사면에는 서어나무와 단풍나무 같은 온대 낙엽수가 분포해 한 분화구 안에서 남북 식생이 마주 본다.
매표소에서 정상 전망 데크까지는 계단 길로 10분, 억새 비탈을 도는 완만한 현무암 돌길로 20분이면 오른다. 구상나무길(1.2km)까지 돌아 나오는 데도 40분 안팎이면 충분하며, 휠체어와 유모차가 다니는 길이 220m 도로 관람로도 따로 나 있다. 걷는 거리가 짧아 반나절 산행을 기대하면 아쉬울 수 있으나, 해가 낮게 기우는 오후 4시 무렵에 맞춰 들르면 만족도가 높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긴 억새 이삭은 역광을 받아야 은빛과 금빛이 또렷하게 살아나니까.
조천읍 중산간 4곳을 하루에 묶을 때는 오전 빛이 밝을 때 와흘메밀마을 밭담길을 먼저 걷는 편이 좋다. 낮 동안 남조로를 따라 제주돌문화공원과 교래자연휴양림 숲길을 차례로 돌아본 뒤, 일몰 1시간 전에 산굼부리로 넘어가면 동선이 매끄럽다. 출발 전 와흘메밀마을 누리집의 실시간 개화 카메라와 산굼부리의 월별 매표 마감 시각만 먼저 확인하고 길을 나서면 된다.
이 기사에 나온 곳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455
- 운영
- 메밀밭 상시 개방(문화제·체험관 09:00~17:00, 봄 5~6월·가을 10월 개화, 누리집 waheul.com 실시간 카메라 확인)
- 요금
- 메밀밭 입장 무료, 메밀베개·빙떡·메밀묵·쿠키 만들기 각 1인 3만 원(유아 베개 2만 원), 마을 탐방 1만 원
- 예약
- 상시 체험 프로그램은 전화 사전 예약 필수
- 주차
- 방문자센터 앞 전용 주차장 무료(목줄 착용 시 반려견 동반 가능)
- 문의
- 064-783-1688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023
- 운영
- 09:00~18:00(매표 마감 17:00, 하늘연못 내부 통로는 안전 관리상 출입 제한)
- 휴무
- 매주 월요일(공휴일이면 다음 평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 요금
- 어른 5000원, 청소년·군경 3500원(설문대할망전시관·오백장군갤러리 포함)
- 주차
- 전용 주차장 무료
- 문의
- 064-710-7731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023
- 운영
- 09:00~18:00(생태관찰로 입장 마감 하절기 17:00·동절기 16:00, 오름산책로 마감 하절기 16:00·동절기 15:00)
- 요금
- 어른 1000원, 청소년·군경 600원(숲속의초가 숙박·야영장 요금 별도)
- 예약
- 숙박동과 야영장은 숲나들e 누리집 사전 예약
- 문의
- 064-710-7475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768
- 운영
- 3~6월·9~10월 09:00~18:40(입장 마감 18:00), 7~8월·11~2월 09:00~17:40(입장 마감 17:00, 연중무휴)
- 요금
- 성인 7000원, 청소년·어린이 6000원, 경로·제주도민·국가유공자·장애인 5000원
- 주차
- 전용 주차장 무료(휠체어 무료 대여, 반려동물·드론·음식물 반입 금지)
- 가는 길
- 제주시외버스터미널·제주대학교병원 정류장에서 212번 버스 승차 후 산굼부리 정류장 하차
- 문의
- 064-783-9900
2026년 10월 기준 정보입니다. 운영시간과 요금은 바뀔 수 있으니 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전국을 다니며 여행 기사를 씁니다. 가 본 곳 가운데 다시 가고 싶은 곳만 TBAG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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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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